델프트는 헤이그와 로테르담 중간에 위치한 소박한 도시입니다
자전거는 ‘여행’과 잘 어울립니다. 조금이라도 빨리, 멀리 가보고자 하는 욕망 그리고 주변을 천천히 음미하고픈 바람의 절충점이죠. 걸음보다 빠르지만,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놓치지 않으며, 마음을 홀리는 매력적인 풍경을 발견하면 곧바로 멈춰 설 수도 있습니다. 온몸을 보듬어 안아주는 상쾌한 바람은 덤. 자전거에 올라타 미끄러지듯 주위를 둘러보면, 눈앞의 풍경은 오롯이 나를 위한 파노라마가 됩니다.
캔버스에 그린 그림 같은 풍경
나라 전체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다는 것, 이것이 바로 네덜란드 여행의 매력입니다
언뜻 보면 네덜란드는 다른 유럽과는 달리 뭔가 커다란 한방이 없어 보입니다. 프랑스의 에펠탑이나 영국의 빅벤 같은 랜드마크가 떠오르지 않고, 피오르와 같은 자연의 향연은 고사하고 두오모나 성가족성당 같은 걸출한 성당도 없죠. 그래서인지 네덜란드만을 유럽 여행의 목적지로 정하는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대부분 당일 경유로 잠시 들르거나, 길어야 1박 2일이어서 암스테르담만 스쳐 지나갑니다.
그런데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 보면 그들의 일상은 정말 눈부십니다. 유유자적한 사람들. 보트를 타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운하를 가로지르고, 그 끄트머리에 앉아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는 가족들. 사람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물 위를 유유히 헤엄치는 백조와 오리, 넓은 초원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는 양과 소를 보면 이게 눈 앞에 펼쳐진 현실인지를 의심하게 만듭니다. 그 사이사이를 가로질러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멀리서 바라보면, 반 고흐가 캔버스에 그려낸 그림이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안타깝습니다. 네덜란드의 매력은 이렇게 소소하지만 눈부신 ‘일상’에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모르고 스쳐만 가니 말입니다.
자전거 타고 보는 네덜란드인의 일상
네덜란드는 자전거의 나라, 자전거의 천국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네덜란드는 자전거를 타고 여행하기 좋은 나라입니다. 아니, 어쩌면 네덜란드 사람들의 일상 속으로 파고들 수 있는 가장 좋은 도구죠. 네덜란드 사람들에게 있어 자전거는 예부터 자연스레 향유되어온 문화이자 생활이기 때문입니다. 전체 인구보다 1.3배 많은 자전거 보유 대수와 온 국민이 연간 150억 km를 자전거로 이동한다는 기록은 그것을 뒷받침합니다. 무엇보다 자전거로 네덜란드 각 도시를 여행하다 보면 그들의 생활과 동화되는 느낌이 들어 여행의 묘미를 더합니다. 나의 일상을 떠나 다른 이의 일상에 빠져드는 아이러니지만, 소소한 일상이 눈부신 네덜란드라는 나라를 이해하기 가장 좋은 방법임이 분명합니다.
만약 당신이 델프트까지 오게 되었다면 저는 당신이 행운을 얻은 사람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암스테르담에서 남서쪽으로 약 70km, 1시간 이상을 차로 달려왔다는 건 네덜란드를 스쳐 지나가지 않는다는 뜻일 테니까요. 더불어 조금은 그들의 일상에 다가갔다고 볼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자전거를 빌려 타고 델프트를 둘러볼 시간입니다.
Het Blauwe Hart(The Blue Heart) by. Marcel Smink
도시의 입구에 다다르면 푸른색 심장 하나가 사람들을 맞이합니다. 1998년에 세워진 ‘Het Blauwe Hart(The Blue Heart) by. Marcel Smink’입니다. 델프트의 작은 상징이 된 이 조형물은 델프트의 대표적인 도자기 색인 청색을 상징하며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를 그린 화가 베르메르가 살던 집터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푸른 심장’ 조형물은 델프트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듯합니다. 인구 약 10만 명의 소도시인 델프트는 네덜란드 주요 도시 20위권에도 들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 존재감은 경제 수도인 암스테르담과 행정 수도인 헤이그의 그것에 전혀 밀리지 않습니다. 네덜란드를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시킨 ‘오라녜 공 빌럼 1세’가 주둔지로 낙점한 곳이 델프트였기 때문이죠. 1581년엔 임시 수도로 지정되기도 했으며, 이후 1584년 빌럼 1세가 암살당한 곳도 델프트였고 그의 시신을 품고 있는 곳도 바로 델프트입니다. 빌럼 1세는 암살당하면서도 다음과 같이 유언을 남기며 대인의 면모를 보여줬습니다. “신이여 내 영혼을 가엾게 여기소서. 신이여 이 불쌍한 이들을 가엾게 여기소서.” 그래서 네덜란드 사람 들은 ‘오라녜(작가 주: 영어로 Orange) 빌럼 1세’를 기리기 위해, 아직도 ‘왕의 날’이 되면 온 나라를 오렌지색으로 물들입니다. 우리가 네덜란드 축구팀을 일컬어 ‘오렌지 군단’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신교회 위에서 만난 아름다운 전망
마르크트 광장에 들어서면 신성한 아우라를 뿜어냅니다
푸른 심장을 지나 우측으로 접어들면 곧바로 ‘마르크트 광장’이 펼쳐집니다. 탁 트인 광장과 마주 보고 있는 커다란 건물을 보면 심장이 두근대기 시작합니다. 푸른 심장에서 바라볼 때 오른쪽에 위치한 것은 ‘신(新)교회’고, 왼쪽에 위치한 건물은 ‘구(舊)시청사’입니다. 광장 한가운데로 발길을 옮겨 그 둘 사이에 서면 마치 나를 중심으로 세계가 돌아간다거나, 위대한 어떤 두 존재가 나를 두고 대립해 있는 오묘한 느낌마저 듭니다. 우리나라 63빌딩의 250m에 한참 못 미치는 109m 높이의 교회지만, ‘신’이라는 존재를 머금은 첨탑의 아우라는 가히 압도적입니다.
하지만 신은 자신에게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를 줍니다. 교회로 들어가면 그 끝으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있습니다. 물론 절대자에게 가까워지기 위한 비용은 지불해야 합니다. 좁디좁은 원형 계단은 내려오는 사람과 올라가는 사람으로 뒤엉킵니다. 인생의 고단함을 되새기며 계단을 올라가다 보면 마침내 한 줄기 빛이 보이는 꼭대기에 이릅니다. 지난날의 고단함을 벗어버리고 천국에 온 듯 시원한 바람에 몸과 영혼을 맡깁니다. ‘구원’이란 이런 걸까 잠시 만끽하다 눈을 들면 네덜란드 도시의 정수리가 내려다봅니다.
네덜란드는 산이 없고, 지반이 약한 이유로 초고층 빌딩이 드물어 높은 곳에서 도시를 내려다볼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습니다. 그러니 델프트에 왔다면 신교회 꼭대기를 오르길 강력하게 추천합니다. 서는 곳이 달라지면 풍경 역시 달라집니다. 탁 트인 하늘과 시원한 바람, 가지런히 정리된 도시의 정수리와 저 멀리 보이는 지평선은 힐링 그 자체입니다.
시간을 머금은 델프트의 골목골목
델프트 도자기는 세계적인 명품 도자기로 유명합니다
델프트는 제2차 세계대전의 피해를 거의 입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광장을 벗어나 골목 사이사이를 지나다 보면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지는데 이러한 역사적 흔적이 델프트의 매력을 한층 끌어 올립니다. 광장부터 골목까지 ‘Royal Delft Ware’라는 간판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명품 도자기로 유명한 도시임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는 순간이죠. 사실 델프트 도자기는 중국산 청자의 아류가 그 시작입니다. 17~18세기 동인도 회사로 해상 무역을 장악했던 네덜란드는 청자를 들여와 비싸게 팔곤 했는데 이를 대중화하기 위해 이탈리아 도예 장인들을 델프트로 영입해 청자를 모방한 제품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점점 델프트만의 디자인 요소가 가미되면서 18세기에 이르러 ‘델프트 도자기’라는 독립적인 정체성을 갖추었습니다.
델프트의 도자기는 그릇만이 아니라 타일과 같은 인테리어 재료로도 발전되었습니다. 델프트 태생의 베르메르는 그의 또 다른 작품인 ‘우유 따르는 여인’의 오른쪽 아래에 델프트 타일을 그려 넣기도 했습니다. 하얀색과 푸른색의 오묘한 조화, 델프트에서만 느껴지는 특유의 디자인을 보고 있노라면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동시에 그 가격을 보고 나면 더 큰 탄성이 튀어나올 수 있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이 좋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운하길을 달리다 보면 또 다른 풍경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렇게 골목을 거닐다 보면 결국 네덜란드 도시 어디에나 있는 운하길을 만날 수 있습니다. 길 따라 골동품 시장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는데, 팔고 있는 물건들을 보면 타임머신을 탄 듯 희귀하고 오래된 것들로 가득합니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면 운하길 옆에 있는 구(舊)교회가 시야에 들어옵니다. 신교회에 비해 작고 수수하지만 멀리서 봤을 때 약 10도 이상 기울어진 것이 눈길을 끕니다. 네덜란드 피사의 사탑이라는 별명을 붙여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운하를 메꿔 짓다 보니 기운 것이라 정기적으로 재건축과 보수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광장을 지나 골목을 누비며 시간 여행을 하다 보면 어김없이 허기가 찾아옵니다. 이땐 광장 주변이나 큰 골목에 위치한 하링(청어) 가게로 향하는 것이 좋습니다. 양파를 곁들인 하링 샌드위치는 꼭 먹어봐야 합니다. 맛이 낯설지만 네덜란드의 식문화를 느끼기에 제격입니다. 더불어 갓 튀겨 바삭하고 따뜻한 ‘키블링(대구튀김)’은 한국인의 입맛에도 잘 맞습니다. 곁들여지는 네덜란드 감자튀김은 허기진 육체는 물론 영혼까지 위로해줍니다.
이젠 운하 옆에 가지런하지만 제각각 놓인 테이블에 앉아 커피나 차를 시켜놓고 주위를 음미합니다. 움직이는 듯 아닌 듯 흘러가는 운하와 상쾌한 바람, 골동품 가게들을 지나는 사람과 자신의 추억을 팔려는 사람들의 분주함이 기분 좋게 다가옵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네덜란드’와 델프트의 ‘일상’에 젖어 듭니다. 어쩌면 이것이 가장 빛나는 여행의 순간이 아닐까 싶습니다.
글. 송창현(< 진짜 네덜란드 이야기 >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