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 안무가 제임스 전에게 춤이란 무엇인지 들어봤습니다
순수 예술과 대중 예술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경계가 있습니다. 국내 최초의 민간 발레단 서울발레시어터의 창단 멤버이자 상임안무가, 현재는 한국체육대학교 생활무용학과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안무가 제임스 전은 순수 예술로 인식되는 발레를 통해 예술과 대중 사이의 거리를 좁히고 경계를 지웁니다. 순수 예술과 대중 예술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그가 이야기하는 예술의 안과 밖, 그 경계 짓기의 무의미함에 대해 전합니다.
현실과 꿈의 경계에서 발레를 만나다
l 안무가 제임스 전이 춤을 추게 된 곳은 어떤 경계였습니다
기준은 세계를 나눕니다. 그 기준에 가까운 것은 ‘우리’라는 울타리 안에 놓이고, 멀거나 생경해서 경계를 벗어난 ‘타자’는 울타리 밖에 자리합니다. 그렇게 경계가 생기는 순간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해도 되는 것’과 ‘하면 안 되는 것’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안정을 갈구하며 안으로 들어설 것인지, 자유를 희구하며 밖으로 나설 것인지 딜레마가 시작됩니다. 제임스 전은 대부분이 따르는 이 흐름이 따분했습니다. 그에게 안팎은 결과일 뿐 별 의미가 없었습니다. 기준 때문에 갇힌 우리는 답답하고, 배회하는 타자는 불안했습니다. 그래서 경계를 흔들고 뒤틀고 싶었습니다. 기준을 없애고 ‘바깥 없는 세계’를 꿈꿨습니다. 아무도 시도하지 않은 것을 시도하고, 아무도 받아들일 것 같지 않은 결론에 이르는 모험을 좇았습니다. 그 첫 번째가 무용이었습니다.
“열두 살에 미국으로 이민 가서 평범하게 지냈어요. 대학교 땐 회계학을 공부하면서 연극을 했죠. 어느 날인가 교수님이 연극하려면 무용을 배우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럴까 싶어서 봤는데 재즈 댄스는 엉덩이, 허리 움직이는 게 어렵고 현대무용은 자꾸 바닥을 구르고(웃음). 발레는 달랐어요. 할 수 있겠더라고요. 워낙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기도 했고요. 이거다 싶었죠.”
대학교 2학년, 늦어도 한참 늦은 나이에 발레를 시작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발레를 평생의 업으로 선택했습니다. 당시 샌프란시스코 발레단 단원이던 선생님이 아직 늦지 않았다며 그를 응원했습니다. 그는 캘리포니아 멘로파크 댄스아카데미에 공부하고 싶다는 편지를 썼습니다. 가족에겐 비밀이었습니다. 장학금을 받으며 개인 레슨을 받았고 1982년에 뉴욕 줄리어드 예술대학에 입학했습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가족은 이전과 다른 그의 꿈을 반대했습니다. 낯선 곳에서 어떻게 혼자 살겠느냐며 뉴욕행을 만류했습니다.
하지만 무엇도 그를 막을 순 없었습니다. 가족의 지원 없이 틈틈이 모아둔 2,000달러를 들고 뉴욕으로 향했습니다. 안온한 일상의 경계를 벗어나자 모험이 시작됐습니다. 발레는 분명 현실의 바깥이었으나 그를 깨어 있게 하는 꿈의 안쪽이었습니다.
순수 예술의 아이콘, 발레로 대중과 소통하다
l 순수 예술과 대중 예술, 안무가 제임스 전은 그 간극을 어떻게 했을까요?
“줄리어드는 내 가능성을 봐준 거예요. 한국에 있었다면 발레를 시작할 수 있었을까,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을까 생각해요. 아마도 어려웠겠죠.”
7년 동안의 뉴욕 생활은 한마디로 컬처 쇼크였습니다. 예술가들의 자유로운 일상, 할렘과 이스트빌리지의 다양성이 빚어낸, 이전과 다른 모든 시간이 그에게 영감이었습니다. 게다가 고등학교 때 빠져 있던 퀸과 레드 제플린, 줄리어드에서 깊이 영향 받은 클래식 음악과 연극이 어우러져 그의 예술 세계를 풍요롭게 만들었습니다. 이후 전문 무용수로 유럽으로 건너가 모리스베자르 발레단에 머물렀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플로리다 발레단에서 지냈습니다. 춤 하나면 시공을 넘나들며 어떤 것도 가능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예술은 일상과 경계 없이 만났습니다. 그러다 유니버설발레단의 객원 무용수로 한국에 들어와 같은 무용수였던 아내를 만났고 국립발레단에 적을 두면서 본격적인 한국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발레단 서울발레시어터를 아내 김인희 씨와 함께 창단했고 그것이 그의 두 번째 모험이었습니다.
“국립발레단 단원들과 밥을 먹다가 ‘우리 것을 만들어 보자’ 하고 이듬해 서울발레시어터를 만들었어요. 돈도 인맥도 없고 정치도 못하면서 겁도 없이요. 그래도 발레의 대중화와 창작 발레의 세계화를 위해 열심히 달렸어요. 하고 싶은 것을 다양하고 자유롭게 펼치는 게 참 어렵더군요. 단원들을 착취하지 않으면서 꾸리려니 만만치 않았어요.”
어떤 기준에 따른, 흉내 내기에 가까운 춤은 그를 답답하게 만들었습니다. 외국 안무가의 고전 작품이 아닌 제 몸에 꼭 맞는 옷처럼 무용수도 관객도 자유로운, 진짜가 녹아 든 공연이 필요했습니다. 1995년에 문을 연 서울발레시어터는 이듬해인 1996년 창작 발레 <손수건을 준비하세요>를 무대에 올려 40회나 공연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공연시장의 특성과 발레에 대한 대중의 편견은 창작 공연이 대중을 만나기 어려운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호두까기 인형>, <백조의 호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백설공주>, <한여름 밤의 꿈>을 비롯한 가족 발레를 무대에 올렸습니다. 스스로를 자유롭게 하기 이전에 더 많은 사람이 발레와 맞닿기를 바란 까닭이었습니다. 1%의 문화가 아닌 누구나 마주할 수 있는 예술이기를 바랐습니다. 특권계층이 만든 예술에 대한 편견, 그 단단한 경계를 허물고 일상에 발레를 들이는 작업. 그것이 20년 동안 제임스 전이 서울발레시어터를 이끌어 온 동력입니다.
춤 하나로 예술의 안과 밖을 자유롭게 넘나들다
l 안무가 제임스 전은 춤으로 세상과 이야기합니다
제임스 전은 누구든 몸으로 발레를 느끼기 바랍니다. <빅이슈>를 판매하는 노숙인들에게 발레를 가르치는 ‘홈리스 발레교육’, 장애 어린이와 비장애 어린이의 ‘더불어 행복한 발레단’ 공연, 미혼모를 위한 발레 수업은 물론, 콜롬비아의 성매매와 마약에 노출된 어린이와 경찰을 위한 발레 수업 모두 그 연장선에서 시작된 세 번째 모험입니다.
“뉴욕의 어느 노숙인은 돈이 아주 많은 여성이었어요. 교통사고로 남편과 자식을 잃고 거리로 나온 거죠.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요. 아침에 눈을 떴는데 내가 왜 살아야 하지 싶을 때가 있어요. 살면서 누구나 그런 순간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럴 때 제겐 발레가 힘이 됐어요. 정신이 맑아지고 내 몸을 알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노숙인들의 재활과 자활을 돕기 위한 발레 수업을 시작했어요.”
1%의 관객이 향유하는 발레를 나누는 건 경계 밖 사람들을 안으로 들이려는 노력이 아닙니다. 발레라는 기준으로 나뉜 세계의 금기와 가능성을 재구성하는 작업입니다. 경계에 대한 저항이 없는 그에게 발레만큼 정직한 수단은 없습니다. 그 멋진 수단을 품고 그는 네 번째 모험을 준비합니다.
“서울발레시어터가 20년 되던 해 상임안무가 자리를 내려놨어요. 새롭고 자유로울 서울발레시어터의 미래를 위해서죠. 그리고 지난해 겨울부터 다시 춤을 춰요. 단원들에게 기회를 주고 그들이 스타가 되기를 바라면서 멈췄던 춤을 다시 시작했죠. 미하일 바리시니코프는 일흔이 넘었는데 지금도 춤을 추잖아요. 최근에는 정운식 선생과 ‘창무국제무용제’에서 <바람처럼…>이란 제목으로 공연을 했어요. 이제 나만 생각하며 내 춤을 출 거예요.”
그는 판에 박힌 춤이 아닌, 하고 싶은 것을 맘껏 드러내는 춤을 춥니다. 춤이 끊임없이 너울거리는 파도인 것처럼, 살아 있기 때문에 뛰는 심장박동인 것처럼 대면합니다. 돌아보면 그가 경험했던 모든 삶의 경계가 무대였습니다.
글. 우승연
사진. 김현희 프리즘 스튜디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