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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 명작을 만든 이들은 어떤 디테일에 집착한 것일까요?
사소한 것들, 즉 디테일로 역사에 당당히 이름을 새긴 사람들이 있습니다. 명작을 탄생시켜 과거에서 현재로 또 현재에서 미래로 이어지며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사람들, 그들이 집착한 디테일은 무엇일까요?
완벽한 미학의 영화를 추구한 감독, 스탠리 큐브릭
l 스탠리 큐브릭을 거장으로 만든 것은 그의 완벽주의자적 성격입니다 스탠리 큐브릭은 영화 역사상 기념비적인 거장으로 꼽히는 감독 중 하나입니다. <로리타>,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시계태엽오렌지>, <샤이닝>, <풀 메탈 재킷> 등 그의 명작들은 세상에 공개될 때마다 논란의 중심에 섰습니다. 큐브릭의 영화에선 당대의 영화에서 목격할 수 없었던 도전적인 형식과 탐사적인 이미지 그리고 파괴적인 철학이 공존했습니다. 이는 큐브릭이 영화의 기획 단계부터 편집까지, 제작 전반에 관여하고 총지휘한 완벽주의자였기 때문입니다.스탠리 큐브릭이 얼마나 대단한 완벽주의자였는가를 말해주는 일화가 많습니다. 출세작으로 꼽히는 <스파르타쿠스>에는 300명의 노예들이 쓰러져 죽어가는 전투 장면이 나옵니다. 이 장면을 촬영할 때 그는 모든 엑스트라에게 각자 번호표를 들게 한 뒤 확성기로 일일이 동작을 지시했다고 합니다. 배우들의 자연스러운 연기를 끌어내기 위해 동일한 테이크를 수없이 재촬영했다는 사실 또한 자주 회자됩니다. 덕분에 고충을 토로한 배우들은 많았지만 그와의 작업이 무의미했다고 말하는 배우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건 큐브릭의 집요함이 결과적으로 그들에게 특별한 영화적 경험으로 남게 됐기 때문입니다. 그는 극사실적인 이미지를 완성하기 위해 수많은 자료와 문헌을 조사하고 탐구했습니다. 제작 과정에서도 완벽한 영상을 만들기 위해 각 분야 기술자들에게 끊임없이 자문을 구하며 해결책을 논의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덕분에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큐브릭의 영화 현장에서 끊임없이 고민해야 했지만, 그와의 작업 결과에 만족했기 때문에 대부분 별다른 불만을 갖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영화적 사실성이 사실적으로 보이는 무언가가 아니라 진짜 사실이 되길 바랬습니다. 중세시대 배경의 시대극 <배리 린든>을 연출할 때는 완벽한 고증에 바탕을 둔 세트와 의상, 소품을 요구했습니다. 특히 일체의 인공조명을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자연광과 촛불에만 의지해 이 영화를 촬영했습니다. 중세에는 촛불 이외에 다른 조명이 없었으니 당시 시대상을 반영해야 한다는 이유였습니다. 대신 나사에서 위성사진 촬영용으로 만든 자이즈(Zeiss) 렌즈를 카메라에 부착해 조리개를 최대한 열고 영화를 촬영했습니다. 무엇보다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큐브릭은 영화사에서 음악을 조연에서 주연으로 끌어올린 장본인입니다. 당시만 해도 단순히 감상을 고조시키거나 장식적인 요소로 활용되던 음악이 큐브릭의 영화에선 주인공으로 격상됐습니다. 특히 큐브릭은 클래식 음악을 적극적으로 사용했는데, 영화의 지적인 메시지와 철학적 영감이 결부된 하나의 미장센으로 의미를 얻었습니다. 물론 이 역시 그의 완벽주의적 성향이 발휘된 결과였습니다. <배리 린든> 촬영 당시 수천 장의 레코드를 구해 들으며 17세기에 어울리는 음악을 찾았다고 합니다.큐브릭의 완벽주의는 결국 영화 자체를 하나의 완성된 세계로 만드는 비결이었고, 덕분에 그의 영화는 당시에는 가장 영화적이지 않은 영화였습니다. 그는 관객이 바라보는 스크린 너머의 세계가 보다 현실적일 때 되레 생경한 영화가 된다는 것을 잘 이해한 감독이었습니다. 기성품과 같은 오락적 산물로 점철되던 1960년대 할리우드에서 그는 감독 중심의 작가적인 영화 제작 환경을 개척했고, 영화에 예술적인 영혼을 불어넣었습니다. 스티븐 스필버그나 마틴 스콜세지, 우디 앨런, 제임스 카메론, 크리스토퍼 놀란 등 유명 감독들이 그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스탠리 큐브릭, 그는 영화라는 산업의 최전선에서 그 누구보다도 완벽한 예술을 꿈꿨던 최초의 작가였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글. 민용준 영화칼럼니스트, <에스콰이어> 디지털 디렉터
단순한 형태에도 세심함을 쏟아부은 건축가, 미스 반 데어 로에
l 미스 반 데어 로에가 설계한 신베를린국립미술관‘신은 디테일에 존재한다(God is in the details)’는 ‘적을수록 좋다(Less is more)’와 더불어 건축계의 거장 미스 반 데어 로에의 건축 세계를 드러내는 대표적인 좌우명입니다. 미스는 정식 건축 교육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벽돌공이자 석공이었던 아버지 밑에서 처음 건축 일을 배웠습니다. 이후 건축가 피터 베렌스의 사무실에서 일하며 철골과 유리의 가능성을 처음 깨달았습니다. 바르셀로나 파빌리온(1929)에서 그 깨달음을 본격적으로 구현했습니다. 미국 시카고의 일리노이 공과대학의 건축학과장을 맡아 캠퍼스 전체의 설계를 책임지며 자신만의 건축 세계를 본격적으로 펼쳐나갔습니다. 판스워드 주택(1951), 레이크쇼어 아파트(1953), 시그램 빌딩(1958) 등이 대표작입니다.그런 미스에게 디테일은 어떤 의미일까요? 건축에서 디테일은 재료가 서로 맞닿는 지점, 즉 접합부에서 발생합니다. 접합부는 대체로 건물의 약점입니다. 구조를 약화시킬 수도 있고, 방수에 문제가 생겨 건물에 최악의 적인 물이 스며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디테일은 약점인 접합부를 보완하는 기능적 역할을 맡는 동시에 구현 방식(구축술, Tectonic)을 통해 건축가의 미의식을 은근히 드러내는 요소입니다. 건물 전체의 규모에 비하면 너무 작아서 첫눈에 얼핏 들어오지 않을 수 있지만, 관심 있는 사람에게는 많은 것을 드러낸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따라서 장식적 요소를 최대한 배제하고 금속과 유리의 단순한 형태, 자유롭게 열린 평면 등을 추구하는 미스의 건축 세계에서 디테일이란 단박에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철학을 구현할 수 있는 좋은 매개체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건축은 두 장의 벽돌이 조심스럽게 서로 합쳐질 때 시작된다’라는 말로 축조를 위한 접합, 그리고 접합으로 발생하는 디테일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시카고에서 서쪽으로 1시간 정도 떨어진 교외 강가의 판스워드 주택에서 I자 단면의 철골인 I-빔은 2개의 직사각형 평면을 지탱하는 구조적 요소로 작용합니다. 당시의 경향을 고려하면 구조적 요소는 감추어야 마땅했습니다.하지만 미스는 직사각형 유리 상자의 바깥쪽으로 I-빔을 그대로 드러냈습니다. 그 결과 주택은 마치 지면에서 떠 있는 듯한 착시 현상을 불러일으키고, 동시에 강을 바라보는 조망을 수평으로 분할하는 역할을 맡습니다. 또 그는 접합부의 상태에도 주의를 기울였다. 철골이 보이지 않은 부분은 볼트로 연결하는 한편, 드러나는 부분은 플러그 용접 방식을 사용해 흔적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미스의 작품인데도 I-빔을 감추는 역할을 맡은 건물도 있습니다. 마천루의 현대적 전형을 구현한 시그램 빌딩입니다. 건물 뼈대에 유리를 붙이는 커튼 월(Curtain Wall) 양식의 시그램 빌딩은 철골 구조의 건물이지만 뉴욕의 조례를 준수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미스는 기둥을 콘크리트로 감싸 내화처리했습니다. 대신 판스워드 주택처럼 구조체를 드러낼 심산으로 기둥의 콘크리트 껍데기 위에 청동 I-빔을 덧댔습니다. 덕분에 건물의 수직성이 강조되었고 반사되는 빛과 그림자에 의한 다양한 표정을 가지게 됐습니다. 한 가지만으로 디테일 철학을 서로 달리 구현한 것입니다.시그램 빌딩은 조금 다른 맥락의 디테일로도 유명합니다. 바로 건물의 ‘표정 관리’입니다. 블라인드가 들쭉날쭉하게 유리를 가려 건물의 표정을 망치는 걸 우려한 미스는 단 세 가지 상태(열림, 반만 열림, 닫힘)로만 작동하는 블라인드를 부착했습니다. 얼핏 단순해 보이는 형태에 세심함을 쏟아부은 디테일입니다. 즉 형용모순(Oxymoron)적인 조합이라고 볼 수 있는 미스의 철학은 국제주의(Internationalism) 양식으로 자리 잡아 모더니즘의 전파와 정착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청계천로와 삼일대로가 만나는 사거리의 삼일빌딩처럼, 미스의 양식을 충실하게 재현한 고층 건물을 세계 각국의 도시에서 만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글. 이용재 건축칼럼니스트
마술과 같은 디테일을 부린 디자이너, 제임스 다이슨
l 명작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마음 씀씀이의 디테일도 필요합니다
보통 명작이라고 하면 일반인들이 보는 관점에서는 감히 이해할 수 없는 심오한 가치를 가질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명작은 디테일에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많은 명작이 눈에 띄지 않는 작은 디테일까지 꼼꼼하게 처리하는 데서 ‘명작다움’을 얻습니다. 디자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디자인은 완벽한 디테일 처리에서 마술 같은 빛을 발합니다. 제임스 다이슨의 디자인에서 그 사실이 잘 드러납니다.
제임스 다이슨은 영국의 산업 디자이너입니다. 우리에게는 진공청소기로 가장 유명합니다. 그가 디자인한 제품들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소품으로 자주 등장했고, 비싸긴 하지만 백화점에서도 많이 판매되고 있습니다. 누구나 한 번쯤은 보았을 디자인, ‘다이슨’ 제품들이 그의 작품입니다. 다이슨의 청소기는 청소기라기보다 첨단기기 같은 모양을 하고 있어 특히 눈길을 끕니다. 청소기에 이렇게 많은 부분과 기계적 장치들이 필요할까 싶습니다. 그런데 상당히 복잡한 구조이면서도 디테일 처리가 빼어납니다. 완성된 모습만 보면 심플해 보이지만 버튼의 색깔이나 모양, 뛰어난 기술적 처리, 심지어는 표면에 새겨진 글자의 크기와 모양까지도 모두 고려한 디자인입니다. 이렇게 부분과 전체가 잘 어우러지게 만드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의 디자인은 디테일과 전체가 모두 높은 완성도를 지녔습니다. 날개 없는 선풍기 역시 빼어난 디테일 처리가 디자인을 얼마나 마술처럼 만들어줄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이 선풍기의 모양은 청소기보다 더 단순하게 생겼습니다. 반지처럼 속이 빈 둥근 고리가 수직으로 서 있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날개도 없는 선풍기가 어떻게 바람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까요? 이런 마술 같은 비밀은 바로 디자인의 디테일에 있습니다. 둥근 고리의 뒤쪽 테두리에는 얇은 틈이 있습니다. 몸통에서 생성된 바람이 이리로 불어나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이 둥근 선풍기의 모양 전체에서 묵직한 바람이 불어나오는 걸 온전히 설명할 순 없습니다. 그 해답은 둥근 고리의 단면 모양에 있습니다. 둥근 고리의 단면은 비행기 날개의 단면과 모양이 같습니다. 아래쪽에서 형성된 바람이 이 얇은 단면을 지나 틈새로 나오게 되면, 주변에 마치 비행기가 날 때와 같은 기류가 형성됩니다. 틈새로 불어나오는 바람이 빨라지면 빨라질수록 주변에 있는 공기들도 덩달아 이 빠른 기류에 휩쓸려 많은 양의 묵직한 바람이 불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베르누이의 정리’로 알려진 공기의 원리입니다. 외형만 흘깃 보아서는 그저 심플한 모양의 플라스틱 덩어리로만 보이지만 다이슨은 이런 유체역학적 이론을 디테일하게 적용해 날개가 없는 마술과 같은 선풍기를 디자인한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이런 디자인이 다이슨의 공학적 지식에만 기반해서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가 이런 선풍기를 생각하게 된 것은 아이들이 선풍기 날개에 손을 다치지 않게 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디테일이 단지 물리적인 부분만이 아니라 마음 씀씀이에도 필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제임스 다이슨은 단지 공학적인 디테일뿐 아니라 인본주의적인 디테일을 가히 환상적으로 융합해 명작을 만들고 있는, 이 시대 최고의 산업 디자이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