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 30여 년 동안 출시된 국산 대형차는 모두 몇이나 될까요? 이 글을 읽는다면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2016년, 한국을 대표하는 대형차 그랜저가 출시 30주년을 맞았습니다. 30년을 지나오는 동안 그랜저는 6번에 걸쳐 변화해 왔고, 그 사이 수많은 경쟁자들과 함께 국산 대형차의 역사를 함께 써내려왔습니다. 그 시절을 지나온 대형차들을 속으로 한 번 헤아려 볼까요? 몇 종류나 기억하고 계신가요? 아마 이 글을 본다면 방금 미처 떠올리지 못한 추억의 국산차들까지 만나게 되실지도 모릅니다. 80년대부터 쓰여진 우리 고급 대형차의 역사를 함께 살펴보시죠.
1980년대, 본격적인 국산 고급 대형차의 등장
l 대한민국 대표 고급세단 그랜저의 역사는 1986년부터 시작됐습니다
그랜저 (1986)
1986년, 현대자동차의 대표 대형차 ‘그랜저’가 출시되었습니다. 각진 디자인과 커다란 차체가 내뿜는 존재감은 당시 국산차 중 최고였으며, 직선 위주로 그려낸 무뚝뚝한 디자인 때문에 훗날 '각 그랜저'라는 별명을 얻게 되기도 했죠. 그랜저는 디자인뿐 아니라 풍부한 옵션과 첨단 엔진까지 얹어 시장에서 앞서나갔습니다. 2.0 엔진은 최초로 전자연료분사방식을 적용했고 120마력, 최고속도 162km/h의 훌륭한 성능을 자랑했습니다. 또한 국내 대형차 최초로 앞바퀴굴림 방식을 적용하여 눈길과 험로가 많았던 당시 우리나라 실정에 더 적합한 주행안정성을 발휘한 것도 특징입니다.
실내 역시 당시로서는 첨단이었던 크루즈 컨트롤, 스티어링 휠 리모콘과 전동 조절식 시트를 장착하는 등 당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고급차로 꼽기에 손색이 없었습니다. 연식 변경을 거치면서 V6 3.0엔진을 얹고 ABS, 뒷좌석 전동시트, 전자식 에어컨 등을 더해 내실을 다지며 오랜 기간 국내 최고의 대형차 자리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l 대우자동차는 화려한 외관과 최고급 사양을 갖춘 임페리얼을 내놓으며 그랜저에 대응했습니다
임페리얼 (1989)
그랜저가 큰 인기를 얻자 대우자동차도 반격에 들어갔습니다. 1989년 최고급형 차량인 ‘임페리얼’을 출시한 것이죠. 미국 고급차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C필러 랜도우탑을 적용하고(사진 속 모델은 랜도우탑이 적용되기 전 초기형 모델) 곳곳에 크롬 장식을 둘러 외관을 고급스럽게 꾸몄습니다. 당당한 덩치와 화려한 장식이 풍기는 존재감은 국산차 중 단연 최고였죠. 그 존재감에 걸맞게 임페리얼은 국내 최초로 6기통 3.0L 엔진에 자동변속기를 기본 장착하여 국내 최고급 자동차로서의 사양을 갖추는데 성공합니다. 그러나 기존의 수퍼살롱과 크게 바뀌지 않은 차체 구성과 인테리어는 아쉬움을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90년대, 국산 대형차의 르네상스 시대
l 대형차의 부흥기를 맞은 90년대에 기아자동차는 포텐샤를 내세워 대형차 경쟁에 뛰어들었습니다
포텐샤 (1992)
1992년에는 기아자동차가 대형차 경쟁에 뛰어듭니다. 일본 마쯔다의 대형차 루체를 한국 특성에 맞게 다듬어 ‘포텐샤’를 출시한 것이죠. 포텐샤는 큰 차체와 디자인, 고풍스러운 실내 인테리어로 많은 인기를 누렸습니다. 포텐샤의 가장 큰 특징은 라이벌인 그랜저와 달리 후륜구동 방식을 적용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국내 많은 승용차들이 실내공간 확보 등을 이유로 전륜구동 방식을 선택하던 시기였지만, 포텐샤는 후륜구동을 고집하며 고급스러운 승차감을 구현했습니다.
기아자동차 최초로 3밸브를 적용한 2.2엔진은 120마력, 최고속력 175km/h를, V6 3.0엔진은 200마력, 최고속력 195km/h를 발휘해 당시 국내 최고 수준의 주행성능을 발휘하였습니다. 또한 프로젝션타입 헤드램프와 속도감응형 파워스티어링, 뒷좌석 열선시트, 4채널 ABS 등 고급 편의장비와 안전장비도 갖춰 성능과 기능면에서도 앞서나갔습니다.
l 수퍼살롱 브로엄은 고급스럽게 꾸민 안팎과 후륜구동 방식 등의 강점을 내세워 롱런했습니다
수퍼살롱 브로엄 (1991)
당시 대우자동차에서도 포텐샤와 같은 후륜구동 세단을 내놓고 있었습니다. 91년 출시된 ‘수퍼살롱 브로엄’이었죠. 이전의 로얄 수퍼살롱을 대체하는 모델로, 품질과 편의장비를 대폭 개선한 모델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랫급의 중형차 프린스와 비슷한 차체에 2.0과 2.2로만 꾸린 엔진 라인업 때문에 이미 3.0 엔진으로 시장을 이끌던 경쟁자에 비해 월등한 이미지를 구축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후륜구동 방식이 갖는 승차감과 주행성능 등 고유의 장점 덕분에 꾸준히 찾는 이들이 많아 90년대 후반까지 롱런했던 모델입니다.
l ‘뉴 그랜저’는 각진 대형차의 이미지를 버리고 늘씬하고 우아한 모습으로 거듭났습니다
뉴 그랜저 (1992)
1992년, 라이벌이 속속 등장하는 가운데 현대자동차에서도 2세대 ‘뉴 그랜저’를 출시하며 대형차 경쟁구도에 본격적인 불을 지폈습니다. 전보다 더 커진 차체에 곡선을 더해 늘씬한 차체 디자인은 그 동안 직선 위주로 짜여진 국산 대형차 디자인의 흐름을 바꾸는 신선한 시도였습니다. ‘각 그랜저’의 모습을 탈피한 새로운 그랜저는 출시되자마자 큰 인기를 얻으며 대형차 시장의 주도권을 빼앗는데 성공하죠.
부드러운 변화는 실내에도 이어졌습니다. 곡선을 사용한 인테리어는 우아하고 현대적이었으며 사용하기에도 편리했습니다. 대한민국 자동차로는 처음으로 운전석 에어백과 전자제어 서스펜션 등 새로운 안전장비를 탑재하였고 뒷좌석 쿨박스, 뒷좌석 오디오 리모콘 등 넓은 뒷좌석에서 누릴 수 있는 다양한 편의장비가 쇼퍼 드리븐 카로서의 기능까지 충족시켰습니다.
l ‘오너 드리븐 카’라는 생소한 개념의 대형차였던 아카디아는 뛰어난 주행성능이 장점이었습니다
아카디아 (1994)
수퍼살롱 이후 한동안 이렇다 할 대형차를 내놓지 않던 대우자동차는 94년 ‘아카디아’를 출시했습니다. 혼다 레전드를 국내에서 생산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아카디아는 전륜구동 방식이면서도 엔진을 세로로 배치하는 독특한 파워트레인 구성으로 뛰어난 차체 밸런스를 자랑했던 차량이었습니다. 당시 쇼퍼 드리븐 카(전담 기사가 운전하는 자동차) 일색이었던 국산 대형차와 달리 처음으로 운전자가 직접 운전을 즐길 수 있는 오너 드리븐 대형차였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었죠. 다만 오너 드리븐 카로 기획된 탓에 경쟁자들에 비해 수수한 외형과 편의장비는 국내 소비자들에게 매력적이지 못했던 부분이기도 합니다. 뛰어난 차체 기술과 동력성능을 발휘하는 등 직접 몰아본 운전자들로부터는 호평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시장에서 큰 빛을 보지 못했던 비운의 차입니다.
l 그랜저를 넘어서는 차급으로 개발된 다이너스티는 초대형 고급차의 가능성을 보여주었습니다
다이너스티 (1996)
1996년, 현대자동차는 뉴 그랜저를 더욱 고급스럽게 손본 ‘다이너스티’를 개발해 새로운 기함 자리에 앉힙니다. 대형 라디에이터 그릴과 화려한 굴곡을 넣은 보닛, 곳곳에 크롬을 두른 모습은 그 어느 자동차보다 고급스러운 외관을 자랑했습니다. 뉴 그랜저로부터 이어받은 3.5L V6 엔진을 얹어 고급차에 걸맞는 출력을 냈으며 후에는 뒷좌석을 늘린 리무진 모델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그랜저를 넘어서는 초대형 고급차의 가능성을 연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죠.
최고급차답게 편의장비 역시 최고급 사양으로 갖추었습니다. 여러 명의 운전자를 저장할 수 있는 시트 메모리, 모니터가 포함된 AV시스템과 내비게이션. 뒷좌석 전용 AV시스템, 전후 사이드에어백 등이 탑재되었죠. 다이너스티에는 다른 차들에서는 볼 수 없었던 특이한 옵션으로 뒷좌석 우측 VIP석에 전면 에어백을 장착하기도 했습니다. 오직 뒷좌석에 앉는 VIP만을 위한 특별한 고급차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l 기아자동차 역시 다이너스티에 대항하는 초대형 고급차 엔터프라이즈를 내놓습니다
엔터프라이즈 (1997)
기아자동차 역시 포텐샤 모델 라인업을 그대로 두고 그보다 더 크고 고급스러운 모델을 내놓습니다. 일본 마쯔다의 센티아를 우리나라 실정에 맞춰 개발한 ‘엔터프라이즈’가 바로 그것이죠. 차체가 더 커졌음에도 우아한 곡선을 사용해 늘씬한 분위기를 자아냈고, 국산 대형차로는 처음으로 창문 프레임이 없는 프레임리스 도어를 사용해 독특한 멋을 뽐냈습니다. 엔진은 당시 최대 배기량인 V6 3.6L 엔진을 탑재해 220마력의 충분한 출력을 냈고, 포텐샤와 같은 후륜구동 방식을 고집해 좋은 승차감을 낸 것이 특징이었습니다.
실내 역시 최고급차답게 화려하게 꾸몄습니다. 실내 인테리어는 고전적인 느낌이었지만, 당시로는 첨단 기술이었던 내비게이션을 탑재했고, 뒷좌석에서 별도로 조절이 가능한 AV시스템, 안마시트 등을 갖추어 첨단 기술력으로 꾸며진 호사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l 유럽산 기술로 무장한 체어맨의 등장은 대형차 시장에 신선한 자극이 되었습니다
체어맨 (1997)
1997년에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새로운 경쟁자가 등장했습니다. SUV만을 판매하던 쌍용자동차가 메르세데스-벤츠와 제휴를 통해 구형 E클래스를 베이스로 한 ‘체어맨’을 내놓은 것이죠. 고급차의 대명사인 벤츠를 연상시키는 디자인과 유럽산 자동차 특유의 튼튼한 차체는 국산 대형차 시장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을 뿐 아니라 경쟁사에게도 큰 자극이 되었습니다. 겉모습뿐 아니라 벤츠의 기술을 거의 그대로 빌려와 3.2리터 DOHC 엔진과 4단 자동변속기를 조합해 뒷바퀴를 굴리는 후륜구동 방식이었으며, 유럽산 기술로 꾸린 덕분에 안정적인 주행성능을 자랑했던 것이 특징이었습니다.
l 그랜저 XG는 현대자동차가 독자개발한 첫 번째 대형차입니다
그랜저 XG (1998)
1998년에는 그랜저의 후속 모델인 ‘그랜저 XG’가 출시되었습니다. 이전까지의 그랜저와 달리 현대자동차가 독자개발한 모델로, 높은 완성도와 상품성을 갖춘 고급차로 거듭났습니다. 크고 웅장함을 강조했던 기존 국산 대형차의 모습을 버리고 걱당한 크기에 절제미를 살린 디자인으로 오너 드리븐 카로서의 변신을 꾀했습니다. 그간의 대형차를 부담스러워 하던 젊은 중년층에게는 환영할만한 디자인이었죠. 날렵한 디자인으로 공기저항계수를 낮췄으며, 창문을 감싸는 틀을 없앤 프레임리스 도어를 적용해 세련미를 강조했습니다. 뉴 그랜저보다 길이는 줄었지만 실내공간은 오히려 넓어져 뛰어난 차체 설계 기술을 증명하기도 했습니다.
엔진 역시 현대자동차가 독자개발한 델타 엔진을 사용했습니다. 수동변속 기능을 갖춘 자동변속기 ‘H-매틱’을 갖춰 운전에 적극적인 개입이 가능하도록 해 오너드라이브용 대형차로서의 실제적인 기능성을 갖췄습니다. 주행성능 역시 극단적인 부드러움을 고집하지 않고 부드러움과 운동까지도 함께 고려하여 주행성능과 승차감의 균형을 맞추었습니다.
l 에쿠스는 독자개발 대배기량 엔진을 탑재하며 국산 초대형차 개발의 잠재력을 증명했습니다
에쿠스 (1999)
1999년에는 국산 최고급차 자리에 새로운 주인공이 등장했습니다. 현대자동차가 새로운 플래그십 모델 ‘에쿠스’를 출시한 것이죠. 우리나라 최고를 지향하는 자동차답게 에쿠스는 가장 크고 가장 최신의 것들로 속을 가득 채운 자동차였습니다. 수입차에서나 볼 수 있었던 국내 최대 8기통 4.5L 오메가 엔진을 얹었고 여기에 국내 가솔린 엔진 최초로 직분사 기술(GDI)을 적용해 연비와 성능을 향상시켰습니다. 2005년에는 현대자동차가 자체개발한 V6 3.8L 람다 엔진을 탑재해 대형 고성능차 기술의 잠재력을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국내 생산 자동차 최초로 차체 자세 제어장치(VDC)를 적용하기도 했죠.
인테리어도 매우 고급스럽게 꾸몄습니다. 경쟁차가 갖춘 각종 편의사양을 모두 갖춘 것은 물론, 대형 모니터를 적용한 T자형 센터페시아, 고급 오디오 시스템 등을 적용하고 원목 우드그레인과 가죽으로 감싼 인테리어는 편안함을 극대화했습니다. 에쿠스는 해외 최고급 수입차들과 경쟁할 수 있는 진정한 국산 플래그십 세단의 시작을 알리는 모델이었습니다. 이전까지 그랜저로 각인되어 있던 국산차 대표 고급차의 자리는 금세 에쿠스로 대체되었습니다.
그럼 고급차가 본격적으로 대중화되기 시작한 2000년대에는 어떤 차들이 등장했을까요? '한국 대형차의 역사를 살펴보다' 2편이 계속 됩니다.
글. 주태환
◆ 이 칼럼은 필자의 주관적인 견해이며, HMG 저널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