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의 모습입니다
지난 11월 용산 미군기지를 탐방하는 행사가 열렸습니다. 3시간 가량 소요되는 버스 투어는 총 6회에 걸쳐 시범 운영됐으며, 12월에 진행된 2회는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열렸습니다. 현재 미군이 사용 중인 기지의 대부분은 일본군 장교 숙소, 무기-탄약고, 감옥 등 일제강점기 일본군이 지은 건물들입니다. 용산기지 내 조그만 야산인 둔지산은 ‘군대가 주둔한 산’이라는 뜻인데, 그 이름만큼 기구한 운명을 살아왔습니다. 1230년대에는 몽골군이, 1592년 임진왜란으로 왜군이, 1882년 임오군란으로 청나라 군대가, 1894년에는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군이 다시 들어왔습니다. 이후 태평양전쟁에서 승리한 미군이 터를 잡았는데 한국전쟁과 남북 분단 상황 때문에 이렇게 오랜 기간 미군의 본거지로 자리했지요. 용을 닮았다는 데에서 유래한 용산이라는 지명은 언제 용맹한 제 모습을 보여줄지 모르겠습니다.
용산 미군기지의 모습입니다
물론 1990년에 미군기지 이전에 대한 기본합의서가 체결되면서 본격적인 ‘용산 시대’가 다가올 것처럼 보이긴 했습니다. 용산 일대의 부동산 가격도 천정부지로 뛰어올랐지요.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여전히 둔지산을 오르기는커녕 둔지방(둔지산 아래 도성을 지키던 군사들이 주둔한 곳. 지금의 이태원, 동빙고동, 후암동 등) 근처에도 다다르지 못했습니다.
국제공모전을 통해 미군기지를 공원으로 바꾸려는 기본 계획이 수립된 지도 6년이 지났습니다. 예정됐던 2020년이 지나면 정말 공원으로 바뀌는 건지, 의심도 듭니다. 하긴 요즘도 미군기지 부지에 임대 아파트를 짓자는 목소리가 높아지며 계획의 근간을 흔들고 있는 상황이니까요.
국립중앙박물관이 용산에 자리잡기까지, 사연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이미 오래 전에 개발에 대한 고민을 해치우고, 느긋하게 존재하고 있는 건물이 있습니다. 바로 이촌동에 자리 잡은 국립중앙박물관입니다. 2005년에 문을 열었으니 용산 공원 청사진을 그리는 동안의 수많은 변수들 속에서 13년 간 홀로 고고했습니다. 그런데 사정을 들여다보면 또 그렇게 평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역시나 굵직한 현대사의 파도에 밀려 넘실거리기를 여러 번. 숱한 뱃멀미를 견디고 이제야 제대로 정박했다고 봐도 좋습니다.
창경궁 환경전의 모습. 당시 제실박물관은 별도 건물을 짓지 않고 기존 창경궁에 있던 환경전, 명정전 등을 개조해 전시실로 활용했습니다
우리나라 박물관의 시작은 1909년 순종 재임 시 창경궁에 신설한 제실박물관입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황실의 고가품을 정리하고자 했던 목적이 더 컸고, 대중의 관람을 의도한 것은 일제에 의해서입니다. 일제는 1910년 창경궁에 이왕가미술관을, 1915년에는 조선총독부에 총독부박물관을 개관하여 우리의 문화재뿐 아니라 일본의 근대미술품도 함께 전시하였습니다.
지금은 사라진 조선총독부 건물. 현재 위치인 용산으로 이전하기 전, 이 건물 안에 국립박물관이 있었습니다
총독부박물관은 해방 후 국립박물관으로 개편되었는데 전쟁에 의해 부산으로 피난을 가기도 하고,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정치적 슬로건을 위해 민속박물관으로 쫓겨나기도 했습니다. 한 가정이 이사를 가는 일만 해도 신경이 곤두서고 진이 빠지는데 국가 규모의 살림살이가 움직이는 일은 얼마나 힘든 일일지 상상이 안 갑니다. 특히나 실오라기만큼의 흠집도 허용되어서는 안 되는 경우에는 더하겠죠. 마지막 안식처인 이촌동, 현재 국립중앙박물관(혼동을 피하기 위해 공사 초기에는 새국립중앙박물관으로 부르기도 했습니다)으로 이전할 때만 해도 5톤 트럭 490대에 7,700명의 인원이 동원되었으며 약 50억 원의 비용이 들었다고 합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설계 공모작들 중 일부입니다. 태극 모양으로 건물을 설계한 공모작들이 유독 많았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건축을 위한 계획은 정권의 퇴임 시기를 넘기지 않기 위해 빠르게 진행됩니다. 1994년 12월에 현상 설계 공고가 나고, 1995년 5월에 지원자들의 안을 받았습니다. 국제건축가연맹(UIA) 공인을 받은 최초의 국제 공모전이었기 때문에 무려 59개국에서 854팀이 참여했습니다. 건축계 종사자라면 대부분 알 만한 피터 아이젠만, 필립 존슨, 크리스티앙 포잠박과 같은 걸출한 인물들의 이름을 공모전 명단에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명성 높은 건축가라 해도 낯선 나라, 특히 용산이라는 땅이 갖는 복잡한 역학관계와 전통성이라는 이슈까지 다루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과중한 난제 속에서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버린 공모작들도 다수였던 걸 보면 말입니다. 어떻게든 호감을 사겠다고 태극기 모양으로 건물을 올리려는 참가자들이 다수였던 것에 비하면, 거장들의 설계는 설득력이 있는 편이었습니다.
당선의 영예를 안은 정림건축의 입체 도안입니다
당선의 영예는 정림건축에게 돌아갔습니다(시공은 현대건설과 4개 건설사가 함께 맡았습니다). 계획을 이끌었던 박승홍 건축가(현 디엠피건축 대표. 베를린, 미네소타, 하버드 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했으며, 본래 화가를 꿈꾸었던 만큼 컴퓨터 그래픽이 난무하는 요즘도 꾸준히 손으로 그린 아름다운 스케치를 남기는 건축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의 지휘가 좋은 결과로 이어질 수 있었던 데에는 장소에 대한 고민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박승홍 건축가는 ‘한국성과 세계성을 동시에 모색하라’는 박물관 측의 요구에 대해 전통 건축을 방문하며 그 해답을 구하려 했습니다. 부석사의 안양루와 남한산성은 가장 직접적인 참조가 되었습니다. 건축가는 부석사에서 자연미를 살린 질감, 독특한 공간 배치, 크고 작은 돌들이 어우러진 장면을 두고 한국성은 형태적인 것이 아니라 고유한 요소, 정신, 질감, 경험에 대한 문제라는 확신을 갖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광장의 모습입니다
건축가는 ‘한국성’이라는 요구에 천착해 기와를 얹거나 태극 문양을 그리는 시도 대신 단일 육면체를 상정하고 외벽에 성벽의 이미지를 구현하기로 합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멀리서 보면 육중한 덩어리지만, 가까이 가면 세밀하게 분할된 요소들로 무게감이 줄어듭니다. 다양한 크기의 석재가 만들어내는 줄눈에서 리듬감을 읽을 수 있고, 동일한 화강석을 사용하더라도 잔다듬을 하여 거친 질감을 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로 인해 풍부한 감흥을 이끌어 냅니다. 하부에 비해 상부로 갈수록 패턴의 변화는 줄어드는 점도 특이 사항이지요. 공간의 하이라이트는 열린 광장입니다. 닫힘과 열림의 단순한 대비는 모든 세대를 막론하고 어렵지 않은 소통 방식이고, 어디에서도 경험할 수 없는 웅장한 규모에서는 수문을 연 댐처럼 폭발하는 기운이 흘러넘칩니다. 아이들이 뛰어놀기에도 좋고, 계단에 앉아 주변을 관조하기도 좋고, 명암 대비를 활용하여 그럴싸한 사진을 찍기에도 좋습니다.
그런데 공사를 하다보면 예산의 범위를 넘어서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게다가 공공건축의 경우, 이에 유연하게 대처하기 쉽지 않습니다. 또한 다양한 이해집단들의 성난 목소리를 들어주다 보면 애초 계획과 달리 누더기가 되는 일이 허다하고요. 국립중앙박물관의 경우에도 기존 계획과 다르게 변경된 부분이 많습니다.
지어진 지 이미 13년이 넘은 건물에 대해서 새롭게 할 얘기는 없으니, 오히려 지어지기 이전의 모습을 들여다보려고 합니다. <가족오락관>의 ‘고요속의 외침’이라는 게임 아시죠? 귀에 시끄러운 헤드폰을 쓴 채 상대의 입모양만 보고 단어를 맞추는 게임입니다. 물론 참가자의 대부분은 애초에 제시된 단어와 전혀 다른 단어를 발음해버리곤 합니다. 이 게임처럼, 원형을 고수하는 일이란 굉장히 어렵습니다.
대부분의 건축물은 이런저런 이유로 본래 계획대로 지어지기 힘듭니다. 국립중앙박물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연못도 크기가 절반으로 줄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도 본래는 도로와 맞닿은 부분에 널찍한 야외주차장이 계획되었습니다. 건축가의 의도는 버스, 지하철, 자가용과 같은 교통수단이 ‘만남터’라 불리는 전면부에서 한 번 멈춘 뒤, 저 멀리에 보이는 건물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는 경로였습니다. 야외주차장에서 박물관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경계에는 폭이 400m는 족히 돼 보일 정도로 기다란 전통 방식의 회랑이 있었습니다. 이는 안양루와 같은 형식으로서 방문객들은 계단을 몇 단 밟고 올라 통과합니다.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박물관이라고 알려주는 역할이지요. 좌우로 길게 뻗은 종묘가 갖는 위엄과 안양루의 독특한 진입 방식을 합쳤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경계를 넘나드는 의식을 치른 후, 거울못의 테두리를 따라 진입 속도가 느려지다가 마치 투수가 던진 변화구처럼 비스듬히 박물관 본관에 들어서는 경로를 의도하였습니다. 그래야만 박물관의 배치가 서빙고로의 축에서 삐딱하게 놓인 이유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부분이 달라졌습니다. 차량을 갖고 온 사람은 건물 지하 주차장에서 바로 입장하고, 지하철역 출구로부터의 진입은 거울못을 살짝 스쳐가는 고의사구입니다. 박물관에 맞설 수 있게 연못의 규모 또한 거대했으나 절반으로 크기가 줄었습니다.
전시실 입구는 원추형 로툰다 형태입니다
열린마당 또한 그렇습니다. 처음 제시된 바로는 정확하게 직선으로만 재단된 육면체로 만든 비움이었습니다. 지금처럼 지하로 내려가는 좌측 계단으로 인해, 그리고 우측의 거대한 로툰다(유럽 정원 양식의 돔 조형물)에 의해 침식당하지 않은 깔끔한 정방형이었습니다. 로툰다가 좀 더 겸손했으면 어땠을까요. 로툰다는 폭이 넓을 뿐 아니라, 높이도 제법 있습니다. 그래서 외부에서 보면 예술의 전당 오페라하우스처럼 갓을 쓰고 존재를 알리려 애쓴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중앙에 지붕이 불쑥 솟은 탓에 박물관의 벽이 갖는 쭉 뻗은 경쾌함도 희석되고 말았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대해 평론을 쓴 박길룡 교수의 표현을 빌자면 전시실 입구인 원추형 로툰다는 기관지염에 걸렸습니다. 본래 로툰다는 공간을 감싸는 벽의 느낌이 중요한데, 유리 커튼월을 통해 과다한 빛이 유입되는 나머지 연일 블라인드를 내린 모습을 두고 마스크 쓴 환자에 비유한 것일까요?
초기에는 실내를 마감한 라임스톤을 두고도 이런저런 말이 많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직접 박물관을 방문해 본 사람들은 대체로 만족감을 표합니다
실내를 마감한 온화한 빛의 라임스톤(석회암의 한 종류)을 두고 어떤 국회의원은 왜 국내산 대리석을 쓰지 않고 품질도 좋지 않은 수입산을 쓰냐고 질타를 하기도 했습니다. 이 국내산 대리석은 고속터미널 7호선 구간과 강남구청역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이 대리석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지금의 박물관과 결코 어울리지 않는 재료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챌 것입니다. 강원도 정선 출신의 대리석은 패턴이 뚜렷해서 이 커다란 공간을 마감했을 경우 지나치게 화려한 나머지 현기증이 날 정도였을 것입니다. 박물관의 가장 유명한 유물 중 하나인 경천사 십층 석탑이 어째서 원나라산 대리석을 쓰고도 훌륭한 우리의 문화재로 인정받는지를 돌아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빛은 공간에 따라 정교하게 구현됐습니다
비록 주요 개념이 온전히 반영되지 못했지만, 국립중앙박물관이 여전히 뛰어난 공간감을 갖는 이유로는 빛을 들 수 있습니다. 공간에 숨결을 불어넣는 빛의 처리만큼은 그 어떤 시설보다 정교하게 구현되었기 때문입니다. 전시실은 상대적으로 어두운데 관람객이 무심코 들어갔을 때 불편하지 않도록 광장-로툰다-역사의 길(중앙 복도)-전시실로 들어갈 때마다 빛의 양이 10%씩 줄어듭니다. 그리고 역사의 길 위로는 태양의 궤적을 자동으로 쫓아 빛을 실내로 유도하는 반사경이 설치되어 종일 밝고 경쾌한 실내를 연출합니다. 천창에는 프리즘 단열 유리와 이동식 프리즘 시스템이 설치되어 눈부신 빛을 거를 뿐 아니라, 실내 온도를 높이는 적외선과 유물을 손상시키는 자외선을 차단하고 가시광선만을 퍼뜨려줍니다. 복도를 거닐면서 유난히 쾌적하고, 영롱한 느낌을 받았다면 이는 건축과 합일된 기술의 힘이자 라임스톤과의 궁합 덕입니다.
가끔은 이촌동에 위치한 국립중앙박물관이 생활권에서 동떨어진 것이 불만입니다. 지하철 내려서도 어찌나 한참을 걷는지, 가뜩이나 봐야 할 것도 많은데 관람을 시작하기도 전에 지칩니다. 내부는 또 어떻고요. 효율만 강조한 일방향 복도는 백화점보다도 동선이 심심합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구석구석 들여다 볼 곳이 많이 남았습니다. 9만평에 달하는 면적은 어지간한 방문 횟수로는 섭렵할 수 있는 규모가 아닙니다. 또한 준공 후 꽤 시간이 흘렀다 해도 여전히 변화의 여지가 많은 곳이기도 합니다. 앞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대해 다양한 목소리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생기길 바랍니다. 오랜 역사를 갖는 땅에 하나의 건물이 들어서기까지의 사연들, 그리고 이후 개인들이 층층이 쌓아간 추억들 역시 유물들 못지않게 국보급이기 때문입니다.
글. 배윤경(건축가)
건축가 배윤경은 연세대학교 건축공학과와 네덜란드 베를라헤 인스티튜트(Berlage Institute)를 졸업했다. 현재 대학에서 건축 설계와 이론을 강의하고 있으며, 여러 미디어에 건축 관련 글을 쓰고 다양한 강의도 한다. 저서로 <어린이를 위한 유쾌한 세계 건축 여행>, <암스테르담 건축기행>, < DDP 환유의 풍경 >(공저), <가까스로 반짝이는>이 있다.